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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공원

  • 주소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칠천로 265-39

  • 연락처

    055-639-8250

  • 홈페이지

    http://new.gmdc.co.kr

칠천량해전공원 조성배경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일반 여행과 다르게 재난이나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가 체험함으로써 반성과 교훈을 얻는 여행을 목적으로하는 관광을 말한다. 블랙 투어리즘(Blacktourism) 또는 그리프 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불리고 우리말로 역사교훈여행 이라 한다. 9ㆍ11 테러가 발생했던 세계무역센터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 유대인대학살 현장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수용소, 수백만 명이 학살된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등이대표적인 다크투어리즘 코스다. 국내에는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서대문 형무소역사관, 비무장지대(DMZ),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제주 4ㆍ3 평화공원 등이 있다. 2008년 2월 10일 국보1호 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되면서 다크투어리즘 인파가 몰리기도 하였다. 칠천도 해전 공원도 같은 맥락에서 조성되었다. 칠천량해전은 임진왜란 해전지 중 유일의 패전지로 기억되는 곳으로 거제시는 다크 투어리즘 관광지로 선정, 2013년 7월 칠천량해전지를 공원으로 조성해서 칠천량해전이 전하는 역사적 배경과 과정, 결과, 통제사 원균이 선조의 명을 받고 출전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조선수군의 역할과 패전 이후 백성들의 참혹한 참상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속의 숨은 이야기를 만나 진실과 반성의 의미를 가져볼수 있는 칠천량해전공원으로 탄생 시켰다.

임진왜란과 칠천량해전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선조 31년)까지 우리 땅에서 벌어진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다. 일본이 침략을 개시한 1592년이 임진년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이라 하고, 제2차 침략을 감행한 1597년(선조 30년)부터의 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칠천량 해전은 1597년 7월 16일(음력) 새벽,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도도 다카토라 등이 지휘하는 일본 수군에 의해 칠천도 앞바다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사건으로 이 패배는 임진왜란 내내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조선 수군이 처음 겪은 패배였다. 이 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은 거칠 것 없이 한반도 전역으로 진격하게 되었으며, 조선 백성은 일본군이 저지르는 학살과 약탈 등온갖 만행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칠천량해전

7월 11일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원균은 3일 후인 7월 14일 조선 수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가덕도에서는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조선 수군 400여명을 포로로 잃고, 원균은 포로가 된 조선군을 구할 생각없이 도망갔으며 자포자기한 상태로 술에 취해 버렸다. 조선 수군은 7월 15일 칠천도에 도착하고 그날 밤 소수의 일본전함이 경계태세를 갖추지 않은 조선 수군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는 과정에서 판옥선 4척이 불탔다. 조선 수군은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사태를 수습하고 맞서 싸웠으나 7월 16일 새벽,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일본함대가 대규모로 몰려와 조선 수군을 포위하고, 근처의 육지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일본 육군이 조선 수군을 노리고 있었다. 원균은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고성 춘원포로 도망을 갔으며, 조선 수군도 사령관인 원균을 따라 고성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은 물러서지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춘원포에 도착한 조선 수군은 육지에 상륙한 뒤 대부분 달아나고 나머지 조선 수군의 판옥선 대부분도 모두 불에 탔다. 상륙하여 달아나던 조선수군 중 상당수가 미리 육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순천부사 우치적을 비롯한 나머지는 살아서 도망갈 수 있었다. 보통 원균이 이때 전사한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전투 이후에도 살아있는 원균을 목격한 사람이 있어서 정말로 이때 전사한 것 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경상우수사 배설 등이 지휘하던 판옥선 12척과 그 외 여러 배들은 간신히 바다로 도망가는데 성공했고, 배설은 한산도의 통제영으로 도망친 뒤 군사시설, 전함 및 양곡·군기와 군용자재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모조리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이로써 이순신장군이 헌신적으로 일구어낸 조선 수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칠천량해전 이후

칠천량에서 이긴 일본군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전라도였다. 전라도의 수군과 의병은 경상도의 일본군 근거지를 임진왜란 내내 위협했다. 일본군이 평양까지 진격하고서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것은 그 때 문이었다. 권율이 지휘했던 행주대첩의 조선군 역시 전라도 육군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전라도를 침략하여 후방에 대한 위협을 제거한 뒤 조선을 모두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 당하자 일본군에게는 장애물이 거의 사라진 셈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이 나란히 전라도로 진격하여 8월에는 남원과 전주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다음 목표인 충청도로 향했다. 수도인 한양이 다시 위험해졌다. 다행히 9월의 직산 전투에서 일본 육군이 조선·명 연합군에게 패배하였고, 결정적으로 같은 달 16일의 명량해전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장군이 13척의 판옥선만으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고, 결국 1598년에 조선에서 철수하여 장장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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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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