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세포만(知世浦灣)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성종(成宗) 원년(元年)(1470) 지세포진(知世浦鎭)을 두고 성(城)을 쌓았으며 군선(軍船)이 정박하였고 진공(進貢) 및 세곡(稅穀)의 하물선(荷物船)이 접하는 선창으로 거제읍지(巨濟邑誌)에 의하면 고종(高宗) 26年(1889) 왜공(倭供)의 미창(米倉)이 있었으니 선창리(船艙里)라 하였다.
예부터 마을 어귀에 다리를 놓아 다리목이라 하였으며 1930년 지방도 개설때 교량을 새로 놓았다.
본래 바닷가 모래밭이라 사름, 새롬이 또는 사림(沙林)이라 하였는데 구슬같은 모래가 파도에 모여서 백사장을 형성하였고 방풍림으로 심은 소나무는 모래밭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회진(會珍)이라 하였다.
고종(高宗) 26年(1889) 11月 12日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어민(日本漁民)이 입주하여 1918년 현재 지세포리(知世浦里)에 69호(戶) 544명(名)이나 되어 어업의 전진기지가 되었으니 1928年 일운면사무소(一運面事務所)를 고현(古縣)에서 옮겨와 마을이 번창하여 대신(大新)마을이 생겼다.
본래 큰골 또는 큰몰이라 하였으며 지세포진(知世浦鎭)의 대청(大廳)이 있었으니 대동(大洞)마을이라 하였다.
본래 공령 또는 공신령이라 하였는데 이는 지세포리와 소동리의 경계에 동산같은 작은 고개가 있었으니 공령(公嶺)이라 하였다.
대동 초빙골 동쪽에 있는 깊은 골짜기다.
고종(高宗) 26年(1889) 11月 12日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어민이 입주하여 대신(大新)마을의 모래사장에 큰 뱃집으로 기와집을 지어 고래잡이 회사(會社)를 설립하여 작은 고래고기는 간질하여 일본으로 모두 실어갔으며 뒤에 이 회사는 울산의 장생포항(長生浦港)으로 옮겨갔다.
대동 복골 서쪽에 깊이 패여 있는 골짜기다.
공령 앞 바다에 있는 여에서 뱃사공들이 제사를 지냈다.
대신 마을에 지세포진의 관청이 있었다.
대동 서쪽에 지세포진의 관청중 훈련이나 회의를 하던 대청(大廳)이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옮기고 구대청터라 하였다.
지세포에서 와현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선창마을 바닷가에 느티나무 두그루의 당산나무가 있다.
교항 다리목 남서쪽에 연못이 있는 계곡이다.
대동 살맷등 남쪽에 연못이 있는 계곡이다
지세포리 동남쪽 2㎞지점에 지심도(只心島)를 바라보는 갯가에 20여호의 어촌이 있었는데 1981년 한국석유개발공사 제5비축기지 조성으로 모두 이주하였다.
누우래재에서 동남쪽 미조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었다.
대동 못고랑에 벼락을 맞은 바위가 있다.
대동 추지논골 서쪽에 보가 있는 골짜기다.
대동 못고랑 남쪽에 대장간의 불무를 놓았던 등성이다.
회진의 바닷가에 파도따라 밀려모인 모래밭에 방풍림의 해송숲이 있다.
대동 신선봉 남쪽에 썰매질을 하였던 잔디등성이다.
대동 골판골 서쪽 골짜기에 서당이 있었다.
선창마을 지세포성 밑에 별신굿을 하던 성황당이 있었다.
대동 서당골 남쪽 높이 363.7m의 산위에 넓고 네모진 바위에 신선이 내려와서 놀았다는 봉우리로 삼각점((三角点)이 있다.
지세포 북쪽에 있는 등성이에서 봉화를 올렸다.
지세포 서북쪽에 용이 숨어 있었다는 둠벙이 있었는데 1969년 상수도 시설때 메워졌다.
대동 불밋등 남쪽에 산제를 지내던 골짜기다.
성종(成宗) 원년(元年)(1470) 거제칠진(巨濟七鎭)의 하나로 진(鎭)을 두고 만호(萬戶)가 집정하였는데 임진왜란때 해전의 유동으로 만호 한백록(萬戶 韓百祿)이 옥포진(玉浦鎭)에 합동하였다가 효종(孝宗) 2年(1651) 다시 복구되었다.
지세포만의 남쪽 산위에 지세포진성(知世浦鎭城)으로 쌓았으며 둘레 1,096m 높이 3m의 산성이다.
지세포 남서쪽 누우래재 밑에 있는 암자이다.
대동 골판골 위쪽에 있는 길다란 등성이다.
대동 제석골 동남쪽에 가매장을 했다는 골짜기다.
대동 큰골 서쪽에 있는 추씨 논의 골짜기다.
대동 못고랑 위쪽에 있는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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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0-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