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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건너청 또는 건너 하청이라 하였으며 하청의 서남쪽에 위치하니 서리라 하였다.
하청의 동편 대금산의 줄기를 받아 본래 새앗골이라 하였으며 창동과 서리의 사이에 있으니 중리라 하였다.
본래 하청의 본 마을이고 큰 곡창이 있었음으로 창골 또는 창동이라 하였다.
하청의 북쪽에 위치하여 본래 잿골 또는 짝골이라 하였는데 용등산과 녹감산에 둘러쌓여 성안 같다하여 성동이라 하였다.
본래 하청장터가 있었고 1913년 처음으로 면사무소를 설치하여 마을이 번창하여 신동이라 하였다.
창동위 성동마을 밑에 위치하여 1990년대 초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신창(新倉)마을을 분리하였다.
서리 서쪽에 감나무가 많은 등성이다.
중리의 서편 골짜기에 칠원 제씨(漆原 諸氏)의 사당으로 정조(正祖) 17年(1793) 거제도에서 맨처음 건립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성주목사(星州牧使) 제말(諸沫)과 증 병조참판(兵曹參判) 제홍록(諸弘록)을 모셨는데 그후 임란 선무원종공신(壬亂 宣武原從功臣) 제인국(諸仁國), 억(億), 진(璡) 삼형제(三兄第) 등 5인을 모두 모셨다.
신동에 5일장과 우시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우시장이 없어졌다.
하청의 서쪽에 칠천도로 건너가는 나루터였으나 지금은 하청부두 또는 하청뱃머리라 한다.
건너 하청 서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창동 동쪽에 농모양의 바위가 있다.
성동 저수지 아래에 옛날 딱나무 밭이 있었고 밑에 큰골 논들이 있는 골짜기다.
창동 서쪽에 당산이 있고 당거리 다리가 있는 마을이다.
서리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서리의 동메등에 칠원윤씨(漆原尹氏)의 선조묘소 3기가 잔디밭에 있다.
창동 뒤쪽에 있는 작은 등성이다.
서리 뒤쪽에 작은 산이 있다.
창동의 동쪽에 옛날 매사냥을 하였던 산이다.
창동에서 매봉산을 지나 연초면 명동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성동과 창동사이에 있는 밋밋한 등성이다.
성동에서 명동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서리에 있는 등성이로 밑에 배낫들이 있다.
서리에 옛날 군인의 막사가 있던 곳이라 한다.
창동 논골에 있는 골짜기에서 연초면 명동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성동 남쪽에 우뚝 서있는 바위가 있다.
녹각산(鹿角山)밑 성동마을 동쪽에 있는 저수지다.
성동마을 앞 신작로 변에 일본에서 맹종죽(孟宗竹)을 가져와 처음 재배한 소남(蘇南) 신용우(辛容禹)의 공적비가 있다.
성동의 짝골 다리를 사재로 건설한 송덕비가 있다.
하청에서 명동으로 가는 낮은 고갯길의 중간에 등성이가 있다.
창동과 신동안에 있는 골짜기 논들이다.
성동 주수지 위 골짜기에 옛날 절이 있었다.
중리 동북쪽에 제석골이 있고 안쪽산에 오르면 산신제를 지내던 바위가 있다.
중리 위에 깊이 들어간 큰 골짜기다.
창동과 중리사이에 부잣집 여덟분이 살았다는 골짜기다.
성동에서 바다쪽으로 흐르는 큰내를 한내라 하고 건너는 다리를 고종(高宗) 26年(1889) 하구리(河龜里) 다리라 하였다.
하청 부두에서 유계리로 넘어가는 산비탈 낮은 고개이다.
중리 서편에 있는 칠원윤씨(漆原尹氏) 사당으로 성종(成宗) 21年(1490) 거제(巨濟)에 처음 들어온 승명교수(承命敎授) 윤달(尹達)과 후손(後孫) 3인을 모시고 있다.
창동에서 연초면 명동(椧明)인 홈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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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0-11-16